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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소장] 경향신문_18년 넘도록 말 못한 성폭행 피해, 더이상 혼자 감당하지 마세요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 (23)]

  • 관리자
  • 202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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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 날의 기억에 괴로워요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상담 신청>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일곱 살이었던 남동생이 아팠어요. 부모님은 남동생을 살리려고 전국을 돌아다니셨어요.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니고, 좋다는 민간요법은 다 시도해보고, 여기저기 기도를 드리러 다니셨어요. 부모님이 동생을 데리고 전국을 다니시는 동안 저는 고모 집에 맡겨졌어요. 한 달에 한두 번밖에 부모님을 만날 수 없었어요.

그래도 잘 지냈어요. 외롭기는 했지만 괜찮았어요. 고모네는 아들만 하나였기 때문에 고모부는 저를 딸처럼 예뻐해 주셨고, 부모님이 양육비를 충분히 주셨기에 고모도 좋아하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게 지옥의 문이 열렸어요. 고모는 밖으로 돌아다니는 분이셨고, 고모부도 자주 출장 가셔서 집에 어른이 안계시는 때가 많았어요. 저는 중학교 2학년이었던 사촌오빠를 무척 좋아했어요. 키도 크고 다정한 오빠는 제게 동경의 대상이었거든요. 어른이 안계시는 날에는 무서워서 종종 오빠 방에서 숙제를 하거나 책을 보다가 잠들곤 했어요.

문제의 그 날도 별 생각 없이 오빠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니 오빠가 제 속옷에 손을 넣고 제 몸을 만지고 있었어요. 뛰어나오고 싶었는데 아는 척을 하면 더 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모른 척하고 몸만 뒤척였어요. 오빠는 곧 멈췄어요. 저는 깬 척하고 제 방으로 돌아왔어요. 무서웠어요. 고모나 고모부한테는 말할 수 없어서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그런데 한 달이 다 되도록 엄마가 오지 않으셨어요.

그 사이에 두 번째 사건이 발생했어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오빠가 제 옆에 앉더니 제 몸을 슬쩍 만졌어요. 오빠는 뻔뻔하게 행동하고, 저는 반항하지 못했어요. 그 때 저는 죄책감이 느껴졌어요. 저는 공부를 못하는데 오빠는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다 멍청한 내 잘못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오셨어요. 저는 드디어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났어요. 엄마한테 말할 기회만 기다렸어요. 하지만 엄마는 제가 어떻게 지냈냐는 말은 물어보지도 않으셨어요. 도리어 고모가 울고 계시는 엄마를 위로하시는 광경을 봤어요. 고모는 동생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해주셨어요. 내 얘기까지 하면 엄마는 정말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결국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일 년 반이 지났어요. 몇 번의 추행이 더 있었고, 제가 5학년이었던 어느 날 밤 결국 고등학생이 된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그 때 저는 생리를 막 시작한 때이기도 했는데,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에서 성폭행까지 당하자 저는 너무나 두려웠고 제 자신이 더럽게 느껴졌어요.

부모님의 노력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2년 만에 동생의 병이 나았어요. 다시 부모님과 살게 돼서 기뻤지만 저는 어느새 비행청소년이 돼 있었어요. 가출을 하고 술담배도 했어요.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저처럼 가정도 윤택하고 좋은 부모님을 둔 애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제 마음 속에는 나를 보호해주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극심한 분노가 있었어요. 동생도 원망스러웠어요. 그래서 집에 있기가 싫었어요.

대학생이 된 후에는 남학생들에게 인기도 꽤 많았지만, 남자가 옆에 있기만 해도 피부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리고 쓰라렸어요. 스물여덟 살인 지금까지 결혼은커녕 연애를 해본 적도 없어요. 진짜 분노가 끓는 것은 사촌오빠가 수의사가 돼서 결혼하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아주 다정한 남편이라고 해요.

저는 악몽을 자주 꿔요. 사촌오빠 집에 가서 다 폭로하고 그를 후려치는 꿈을 꾼 적도 있고, 제가 가족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꿈을 꾸기도 해요. 그 때마다 제 편은 없어요. 모든 가족이 너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 불행해졌다라고 하면서 차가운 얼굴로 저를 외면하죠. 저는 오열하다가 꿈에서 깨요.

이렇게 아무 말도 못하는 제 자신이 벌레 같이 느껴져요. 자존감 따위는 없는 존재가 바로 저예요. 제가 정말 원했던 것은 엄마에게 위로받는 것이었어요. 저를 만진 오빠를 혼내 주고 뒤도 안돌아보고 저를 그 집에서 데리고 나가주는 것이었어요. 어린 나를 그렇게 혼자 버려둬서는 안됐던 거예요. 이런 제가 너무 불쌍해서 못견디겠어요.

<상담 내용>

수진(가명)씨. 겨우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수진이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요. 믿고 있던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충격인데,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가해자와 계속 한 집에서 지내야만 했다니요. 간절하게 기다리다 만난 엄마에게 결국 아무 것도 털어놓을 수 없었을 때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지금 수진씨 마음 속에 있는 분노와 두려움은 당연한 거예요.

더 안타까운 것은 수진씨가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런 죄책감은 성폭행 피해자들 대부분이 느끼는 잘못된 감정이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피해자들은 잘못을 1%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범죄와 다르게 성범죄는 쉬쉬하면서 덮으려고 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나도 무언가 잘못했을 거야라고 생각하기 시작해요. 정말 억울한 일이죠.

게다가 수진씨처럼 가해자가 가족일 경우는 더 그래요. 가해자를 대놓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에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면서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증오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기 쉬워요.

하지만 수진씨, 더 이상 자책하지 마세요. 잘못은 오직 그가 한 거예요. 그는 이성적 행동을 할 수 있는 모범생이었고 수진씨의 사촌오빠였어요. 그는 참 나빴어요. 게다가 어른이 돼서도 사과하지 않았어요.

스스로를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아요. 성폭행은 인간의 자존감을 훼손하는 범죄예요. 그러다보니 성폭행 피해자들은 자신이 망가졌거나 더럽혀졌다고 생각하게 돼요. 그러나 수진씨의 자존감은 그로 인해 무너지지 않았고 조금도 더러워지지 않았어요. 우리의 자존감은 그따위 폭력에 의해 더러워지는 게 아니잖아요. 더러워진 것은 이런 죄를 지은 그의 삶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수진씨의 몸은 신체화(somatization) 증상을 경험하고 있어요. 신체화 증상은 정신적 문제가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병이에요. 믿었던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니 수진씨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모든 남자에 대해 불신과 거부를 나타내는 건 당연한 것이지요. 피부가 쓰라리고 화끈거리는 증상이 나타날 때 괴롭겠지만 자신의 고통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드러나지 않으면 속으로 곪아 더 큰 병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수진씨는 십수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면서 살아왔어요. 사람들이 봤을 때는 비행과 반항을 일삼는 학생이었지만 사실은 홀로 이 큰 고통을 감당해 온 것이에요. 엄마에게 털어놓기를 포기했던 그 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도 함께 포기했을 거예요.

저는 이제라도 수진씨가 엄마에게 털어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요. 수진씨가 가장 원해온 것이 엄마의 위로잖아요. 수진씨가 겪은 일에 대해, 두려움과 절망에 대해,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던 부모님을 원망한 것에 대해 털어놓으세요. 엄마는 많이 놀라고 미안하겠지만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시는 분이니 결국은 서로가 치유를 향해 나아가게 될 거예요. 수진씨 어머니는 이유도 모른 채 오랜 기간 딸의 방황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이제는 서로가 위로받을 때예요.

사촌오빠에 대해서는 결국 수진씨가 결정할 일이에요. 저로서는 가족들이 받을 상처나 불화보다 이제는 수진씨의 마음을 가장 먼저 고려하라고 조언을 드리고 싶어요. 수진씨는 충분히 아팠어요. 만약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가족이 있다면 그 사람을 가족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용기 내어 이야기해주어 정말 고마워요.

<후기>

우리 사회의 성범죄는 매우 중대한 사회문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연령대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고 방식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친족 간 성폭행’이나 ‘묻지마 강간’과 같은 전통적 범죄 양상에 각종 디지털 성범죄까지 더해져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뉴스를 보면 울산의 성범죄 신상정보 등록대상자가 5년 사이에 80%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러한 추세가 울산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심각한 스토킹 범죄나 성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대중과 여론이 들끓고, 그러다보니 법적 처벌 수위가 상향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실제 양형은 오히려 약해졌다는 반론도 끊이지 않고 있다. 보이기에만 급급한 방식이 아닌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원해야 하는 성범죄 대응과 관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성범죄는 가장 반인권적인 범죄 행위다. 진정성 있고 실효성이 있는 대책을 강력히 요구한다.

▶박상희 소장은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18년 넘도록 말 못한 성폭행 피해, 더이상 혼자 감당하지 마세요

이화여대에서 상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이화여대 출신 30여 명의 상담학 석·박사들과 함께 전문적 심리상담과 코칭에 주력하는 샤론정신건강연구소를 창립해 18년째 소장을 맡고 있다. 2014년 스탠포드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다양한 연구에 참여했다. 한국열린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 이 글은 경향신문에서 발췌했습니다.

<사진/기사 출처: 경향신문>

<기사원문>

▶ https://www.khan.co.kr/life/health/article/202210281750005

[Youtube 박상희의 심리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