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상담위원들의 칼럼입니다.

[박상희 소장] 경향신문_죄책감을 털어 내고 ‘눈물의 강’ 헤쳐나가요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 (3)]

  • 관리자
  •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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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을 털어 내고 ‘눈물의 강’ 헤쳐나가요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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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절히 원하면 만날 수 있을까?[경향신문]

‘탈북’이라는 말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향옥씨가 가장 고마워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인 택시기사에 관한 얘기다. 고향 얘기를 하는 도중 그 기사분이 “돈을 받지 않을 테니 이 차 타고 북에 있는 고향까지 갑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향옥씨는 아주 큰 위로를 받았다. 이념과 정치의 잣대를 잠시 접어두고 같은 민족으로서, 같은 사람으로서 이들에 대한 더욱 따듯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시점이다.


■상담 신청

왜 탈북을 했냐고요? 남편과 시댁이 매사에 저를 복종시키고 싶어 했어요. 밤새 술을 구해오라고 내쫓기 일쑤였어요. 북에는 여기 남처럼 슈퍼가 없기 때문에 집집마다 다니며 술을 구걸해야 했어요. 여자는 남자랑 같은 밥상에서 먹지 못한다고 해서 바닥에서 밥을 먹을 때도 많았고요.

그런데 제가 참는 성격이 못돼요. 친정으로 도망갔어요. 그런데 친정은 너무 가난해 먹을 게 없었어요. 그렇게 먹고 살 게 없어서 중국으로 넘어갔어요. 중국에서 돈을 벌어 엄마랑 딸한테 보내주고 싶었어요.

여기 병원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가 처음에는 욕을 하더라고요. 딸을 버리고 온 냉정한 엄마라고요.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요. 내가 죄인이 맞으니까요. 하지만 딸을 버리고 온 건 아니에요. 아이가 굶는 것을 보니까 도저히 못견디겠더라고요. 지 아빠는 땅이 있어 밥은 먹는 집이라서 아빠에게로 다시 보냈어요.

그런데 제 딸이 아파요. 아빠한테 결핵이 옮았대요. 저 때문에 아픈 거예요. 제가 보고 싶어서 병이 난 거일 테니까요. “엄마, 엄마!” 하고 부르는 그 아이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려요. 두고 온 7살 때 목소리가요. 그래서 맛있는 거 먹어도 미안하고, 좋은 거 보아도 미안해요.

여기도 아들이 하나 있어요. 여자가 중국에서 국적 없이 도망자로 살려면 위험한 일이 무척 많아요. 그래서 아이 아빠랑 살게 됐고, 아이를 낳게 됐어요. 여기 와서 먹고 살아야 하니 일하느라 바빠서 아이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과자랑 빵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우고 운동도 못해줘서 아이가 몇 년 전 소아당뇨 판정을 받았어요. 아들도 북한에 있는 딸처럼 결국 엄마 때문에 아픈 거예요.

아들만큼은 제 힘으로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기를 쓰고 노력해 간호조무사가 됐어요. 병원에서 일하며 돈도 벌고, 제 아이 치료도 받을 수 있으니 감사해요. 병원 원장님은 제 사정을 알고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리고 오라 해서 주사를 놓아 주세요.

가끔 저한테 막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북한에서 왔다고 빨갱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어요. 참다 참다가 소리를 꽥 질러요. “내가 왜 아줌마요? 나는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라구요!” 하나님이 불쌍한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 풍족한 땅에 와 살게 해주셨으니 우리 아들은 여기서 잘 키우고 싶어요.

두고 온 딸이 정말 보고 싶어요. 제가 덜 간절하게 원한 걸까요. 이러다가 30년, 40년이 훌쩍 가버리면 어떻게 하나요? 우리 아기는 아프고 나는 늙어가는 데 말이에요. 정말 간절히 원하면 만날 수 있을까요?

박상희 소장이 상담을 진행하며 상대방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다.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제공


■상담 내용

향옥씨(가명), 당신은 눈망울이 참 예뻐요. TV로 북한 여자들을 보면 참 동글동글 순수하고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했어요. 향옥씨 이미지가 딱 그래요. 그런데 향옥씨 성격은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아 북한 여자들은 정말 세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잘 웃고 잘 우는 향옥씨와 얘기를 나누며 제 마음이 눈 녹듯 녹았어요. 향옥씨를 미워하는 사람들 애기를 들으면 저 역시 속상했어요. 그러다가 오해를 풀고 잘해줬다는 얘기를 다시 들으면 기뻤고요.

향옥씨는 기질적으로 욱하기도 잘하고, 정서적으로 울기도 잘하는, 그런 인간적이고 순수한 분이에요. 그런데 이곳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바꿔야 하는 점들이 눈에 띄었어요. 이성적인 대화법, 합리적인 사고법, 그런 교육이 필요한 듯했어요.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된 상담에서 제겐 향옥씨의 태도가 먼저 눈에 들어 왔어요. 주중 일에 지친 향옥씨는 주말이면 거의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지만 이 교육이 진행될 때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경청했어요. 제가 코칭을 하면, 향옥씨는 ‘이건 내가 배우는 거다’ 라고 생각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제겐 좋았어요. 매우 뿌듯했어요.

이 과정에서 어느날 저는 향옥씨 마음에 있는 ‘그것’을 보게 됐어요. 정직하게 말씀 드리면, 당신의 마음 안에 숨어 있는 ‘눈물의 강’을 보고 할 말을 잃게 됐어요. 그 눈물의 강은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이뤄진 거였어요. 이제까지 제가 듣지 못한 가장 슬프고 아픈 얘기였어요.

무심결에 저는 ‘따님이 젊으니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라고 말해 버렸어요. 당신의 간절한 눈빛에 그만 저는 상담사로서 옳지 않은 ‘무조건 희망 주기’를 해버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한마디에 큰 위안을 받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저는 심리상담은 사실 포기해 버렸답니다. 상담은커녕 함께 슬퍼만 하는 심리상담사에게서라도 당신은 위로를 받았나요? 향옥씨, 고마워요. 당신의 아프고,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줘서요.

하지만, 향옥씨, 저는 당신을 도와야하는 상담사이예요. 저로서는 이 말을 먼저 해드려야 해요. 향옥씨가 한국에서 잘 적응하고 편안하려면 말투와 태도를 많이 교정해야 해요. 제 얘기가 기분 나쁜 것은 아니지요?

‘아줌마라고요? 저는 아줌마가 아니라고요!’ 라고 말하는 것은 싸우자는 거예요. 그 대신 “환자분, 병원에서 저는 아줌마가 아닙니다. 저는 아줌마가 아니고 환자님을 돕는 간호조무사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돼요. 향옥씨가 보기에 정 없고, 솔직하지 않은 말투로 보일지 몰라도 이게 여기의 의사소통 방법이라고 생각하길 바래요.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게 또 있어요. 딸도, 아들도 향옥씨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에요. 딸이 앓고 있는 결핵은 전염병이에요. 그 병은 아빠에게서 옮은 것이잖아요. 그리고 아들의 소아당뇨도 향옥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럼 이 땅의 모든 소아당뇨 아이들은 부모 때문에 아픈가요? 간호조무사라서 사실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상담사인 제가 보기에 향옥씨는 자신의 삶이 너무 기구해서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좀 어려운 말일지 모르겠지만, ‘자아 환원주의’에 빠진 것 같아요. 자아 환원주의란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거예요. 자기 책임을 자각하는 건 좋아요. 그러나 이 환원주의에 빠지면 해법을 찾으려 하지 않고, 결국 자포자기하게 돼 버려요. ‘죄책감’이 너무 크면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없어요.

향옥씨 삶이 기구한 것은 향옥씨 책임이라기보다 그런 나라에 살 수밖에 없었다는 현실에 있는 거예요. 향옥씨가 다 책임질 필요 없어요. 현실을 바꿔야 하는 것은 사회이고, 정치이고, 국가입니다. 향옥씨는 현재 주어진 일을 잘 하시면 돼요. 힘든 삶이었지만 향옥씨는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고, 아이를 위해 간호조무사까지 된 훌륭한 엄마이니까요.

간절히 원하면 만날 수 있냐고 물어보셨죠? 향옥씨에게 또 ‘무조건 희망 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람은 ‘소망’이 있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북에 두고 온 딸을 보고 싶어 하는 향옥씨의 소망은 언젠가 딸을 만날 거라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어요. 그런 믿음과 소망은 향옥씨도, 딸도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증거예요.

사랑, 소망, 믿음이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아닌가요? 향옥씨와 따님이 언젠가 만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가 다시 심리상담사의 본분을 벗어난 건가요? 향옥씨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후기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탈북’이라는 말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말만 들어도 짜증이 날 수 있는 현실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념적·정치적 잣대로만 평가해선 안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지 않을까. 향옥씨가 가장 고마워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인 택시기사에 관한 얘기다. 고향 얘기를 하는 도중 그 기사 분이 “돈을 받지 않을 테니 이 차를 타고 북에 있는 고향까지 갑시다” 라고 했다고 한다. 향옥씨는 아주 큰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념과 정치의 잣대를 잠시 접어두고 같은 민족으로서, 같은 사람으로서 이들에 대한 더욱 따듯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박상희 소장은



이화여대에서 목회상담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이화여대 출신 30여 명의 상담학 석·박사들과 함께 전문적 심리상담과 코칭에 주력하는 샤론정신건강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열린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위의 사례는 유튜브채널 ‘박상희의 심리스튜디오’에서 진행 중인 무료심리상담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에서 12월 20일부터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